헝가리 사회정책학자 Z. Ferge(1989)는 사회복지역사가 빈민법에서 시작되어 사회보험을 거쳐 복지국가로 발전했다는 사회복지역사 3단계론을 주장했다. 매우 통찰력 있는 견해인데, 유럽 여러 나라의 사회복지역사를 면밀히 고찰한 결과겠지만, 영국을 가장 많이 참고한 것 같다. 왜냐하면 빈민법, 사회보험, 복지국가라는 사회복지역사의 3단계 발전에 가장 잘 부합되는 나라가 영국이기 때문이다.

  빈민법부터 그렇다. 빈민법은 농촌 노동자의 임금상승과 노동력의 이동을 억제하고 노동능력이 있는 부랑자의 강제적 이용을 위한 중상주의적ㆍ공안적 사회정책이다. 빈민법은 14~16세기의 농촌 노동력에 대한 국가 통제에 초점을 둔 여러 빈민법에서 절대주의국가의 성립과 함께 국가의 부랑인 통제를 보다 체계화한 엘리자베스빈민법, 그 후 빈민법을 시대 상황에 맞게 조금씩 손질한 정주법, 토마스 길버트법, 스핀엄랜드법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빈민법의 대수술이 불가피해지자 제정된 신빈민법으로 발전했다.
  19세기 산업자본주의시대가 도래했다. 도시 노동자계급이 등장하고, 열악한 생활조건, 만성적이고 주기적인 실업, 극도의 저임금, 열악한 위생과 보건 등등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사회문제가 야기되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지배층은 빈민법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입법은 생각 못하고 기존 빈민법을 땜질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시대착오적인 신빈민법이었다.
  빈민법은 공공부조로 계승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이 복지국가의 일환으로 신설한 국민부조(공공부조)는 엘리자베스빈민법 이래의 빈민법을 개혁한 것이다. 빈민법과 공공부조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빈민을 대상으로 하고 재정을 정부가 조달한다는 공공부조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빈민법에서 나온 것이다. 빈민법은 사회복지서비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아동복지, 노인복지, 장애인복지 등 사회복지서비스는 빈민법의 원내구호와 원외구호가 시설보호와 거택보호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사회보험은 주 대상자가 프롤레타리아트였고(후에 화이트칼라와 도시농촌의 자영업자 계층에게로 확대되었지만 사회보험의 도입 초기에는 산업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했다), 재정을 자본가, 노동자, 국가 등 3자가 부담한다는 점에서 가장 대표적이고도 전형적인 자본주의 복지정책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사회보험이 등장한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인 사회보험이 19세기 말 당시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영국이 아니라 후발 공업국 독일에서 먼저 출현했다. 독일은 1880년대 비스마르크 사회입법(건강보험, 산재보험, 연금)을 통해 사회보험을 도입했다. 영국은 이보다 대략 한 세대 늦은 1911년에 국민보험(건강보험과 실업보험)을 도입했다.
  복지국가는 영국제라 해도 될 정도로 영국이 주도적이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이미 복지국가의 청사진 베버리지보고서를 만들었고, 종전 직후 노동당 정부가 집권하여 복지국가를 탄생시켰다. 복지국가는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강해진 노동자계급과 시민의 힘이 바탕이 되었다. 복지국가가 성립함으로써 사회복지의 대상이 노동자계급에서 전 국민으로 확대되었고, 소득보장뿐만 아니라 주택, 교육, 보건의료 등 시민의 다양한 욕구가 충족되었으며, 사회복지가 자비나 은전이 아닌 시민의 권리로 인정되었다.
  복지국가는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함께 후퇴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의 원조도 영국이다. 1979년 집권한 대처는 과거의 온정주의적 보수당 철학을 자유와 경쟁과 효율을 중시하는 냉혹한 자유주의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신자유주의는 복지국가를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복지국가의 위기 또는 후퇴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현재 복지국가의 제도적 틀이 유지되고 있고, 여전히 국가재정의 상당 부분이 투입되고 있다는 점에서 복지국가가 파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와 그 뒤를 이은 제3의 길 노선에서 볼 때 케인스주의 복지국가가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한편 영국 사회복지역사에서 제외하면 안 되는 것이 민간활동이다. Ferge의 3단계론은 민간사회복지의 성장ㆍ발전과 공공복지에 미친 영향을 무시하고 있지만, 민간사회복지는 빈민법 초기단계부터 이미 상당한 역할을 했다. 교회의 빈민구제사업이 그것이다. 중세 교회는 지역의 빈민, 홀아비, 과부, 고아, 부랑자를 위한 최후의 피난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민간사회복지는 중반 빈민법 시대가 퇴조하는 19세기 중반(사회보험 도입 이전) 부흥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 민간사회복지활동은 신흥 부르주아지가 주도했다. 이들은 기존의 봉건적인 빈민법에 대한 비판정신과 자신이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새로운 자선활동을 개척했다. 영국과 미국의 자선조직협회와 인보관이 대표적이다. 자선조직협회와 인보관은 케이스워크, 그룹워크, 지역사회복지 등 전문사회복지실천(professional social work)의 기원이 되었다. 자선활동을 통해 축적된 지식과 기술이 바탕이 된 결과였다.
  본 서는 빈민법, 사회보험, 복지국가로 이어진 영국 사회복지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빈민법에서는 초기 빈민법, 엘리자베스빈민법, 신빈민법 등 빈민법의 변화 궤적을 자세히 분석했다. 사회보험과 복지국가에서는 국민보험, 베버리지보고서, 애틀리 노동당 정부의 복지국가 건설, 대처보수당 정부의 복지개혁에 이르는 복지국가의 등장과 후퇴 과정을 빠짐없이 정리했다. 지금까지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애틀리와 대처 사이의 기간, 즉 1951~1979년의 사회정책의 변화도 포함시켰다. 민간사회복지부문도 자세히 다루었다. 사회복지기관과 사회복지실천기술의 원조인 자선조직협회와 인보관의 활동내용에 초점을 두었다.
  본 서가 개별 사회정책과 관련 사건을 다룸에 있어 시종일관 견지한 관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민중을 삶을 미세한 부분까지 기술하는 사회사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정책에 대해 사회세력들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이익관계는 어땠는지를 따지는 계급적 관점이다. 민중의 삶을 사회사적으로 접근ㆍ분석하면, 사회정책이 나오게 된 배경을 생생하게 복원시킬 수 있다. 사회정책을 계급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정치인들의 말과 다른 정책의 진면목과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영국의 사회복지 역사를 연구한 저서는 셀 수 없이 많다. 빈민법과 복지국가에 대한 높은 관심 때문이다. 국내에도 여러 권의 책이 나와 있다. 그래서 출간을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본 서의 두 가지 관점, 즉 사회사적 관점과 계급적 관점이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용기를 냈다. 본 서가 영국 사회복지의 역사를 이해하고, 나아가 복지국가의 본질을 통찰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19년 4월
원 석 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