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장애인, 장애인복지, 장애정책.

  지난 20여 년 동안 내 삶의 가까이에서 함께해 온 화두들이다.
  이들에 대해 어떻게든 사회적 해답을 제시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여정이었지만 이들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과 관점, 여전히 감추어진 미지의 세계 때문에 늘압도당했다. 먼 길을 달려오면서 많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많이 남았음을 직감적으로 눈치 챈다.
  실상 안다는 것도 몸이나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깨우친 게 태반이었다. 저자의 박사논문을 심사하러 한걸음에 달려오신 도로시 아트킨슨(Dorothy Atkinson) 교수님은 생애사적 관점에서 발달장애인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 한평생을 바치신 분이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장애인정책을 연구할 것인가… 이후 논문을 끝내고 도버해협을 건너오던 비행기 안에서 눈물이 한없이 내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행정고시를 하고 박사학위도 얻었으니 더 뭔가 애를 써서 이룰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눈물 때문에 앞이 보이진 않았지만 내 미래는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래… 장애인정책의 가야 할 방향을 그렸으니 그 실현을 위해 배운 것을 나누어 보자…’
  그러나 비행기 안이라 발을 땅에 딛고 생각한 것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그런 감상적인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복잡한 한국 현실에 적응한다는 미명 아래 조금씩 초심은 잊혀 갔고 사회적으로 한 계단 더 올라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공무원에서 교수로 신분이 바뀌고 나니, 더욱 여유롭게 장애인정책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장애인복지를 가르치면서 이 책을 집필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많은 동료교수들의 좋은 책들이 있고 또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를 각 개인이 얼마든지 항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한 가지 욕심이 생겼다.
  ‘장애인복지의 본격적인 내용 이해에 앞서 그러한 것이 왜 필요한지를 평소 우리가 던지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하면서 내용을 이해하게 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예를 들어, 장애인 소득보장의 갈래들을 소개하기보다는 ‘모든 사람은 자기 밥벌이를 자기가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왜 장애인에 대한 소득지원이 필요한 거지? 소득을 창출하기 어렵다고? 그렇다면 그런 분들에 대한 일반적인 소득보장정책이 있잖아? 그런 것으로는 안 돼? 충분하지 않아? 왜 그런데? 그렇다면 뭐가 필요하지?’라는 질문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장애인 소득보장의 갈래가 궁금해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앞부분이 없이 소개되는 다양한 정보는 그 자체로는 매우 소중하지만, 장애인복지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그 앞단의 내용을 다 안다는 전제하에 출발하기 때문에 열심히 학습하고도 던져지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제대로 대답을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어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장애등급제가 폐지되고 커뮤니티케어정책의 서막이 올라 탈시설화가 본격적으로 가속화될 전망이어서 이러한 내용을 조망해 볼 수 있는 지면적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펜을 들게 되었다.
  이 책은 크게 네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첫 번째 주제는 사실과 관점에서의 장애 개념을 다루고 있다. 그간에 손상과 장애를 개념적으로 나누고 장애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흐름 속에 우리나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장애등록제를 시행하는 우리는 행정적 개념에서의 장애인이 누구인지를 획정해야 하므로 학술적이거나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장애와는 구별되는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학술논쟁적 개념과 행정적 개념 사이에 간극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 관점을 살펴보는 것으로 제1장을 구성했으며 제2장에서는 장애등급제 폐지가 어떻게 전개되었고 어떤 결과를 초래했으며 앞으로의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쉽게 조망할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하였다. 제3장에서는 장애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살펴보았는데 이는 다분히 이후 주제를 논하기 위해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초점을 두었다. 마지막으로 제4장에서는 최근 우리 사회의 장애 이슈를 선도하고 있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모델과 자립생활모델에 대해 살펴보았다. 단순히 이를 설명하기보다는 영국과 미국이라는 출신성분이 다른 두 모델이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비슷한지를 살펴봄으로써 실천현장에서 어떤 모델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덜어낼 수 있도록 하였다.
  두 번째 주제는 장애인 정책이다. 어느 것이든 정책이 아닌 게 없겠지만 장애인 정책의 3두마차라고 불리는 소득보장, 장애인 교육 그리고 직업재활과 고용에 대한 정책을 제5장, 제6장, 제7장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장애로 인해 노동시장에 참여하기가 어렵고 장애로 인해 더욱 힘들어진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장애를 고려한 교육방법이 제대로 개발되지 않는 한 장애인의 삶이, 그들의 소득이 높아질 수 없고 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세 가지 정책을 둘러싼 다양한 쟁점들이 무엇이고 이들의 기초가 보다 탄탄하게 구축되어 장애인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기본 여건의 변화방향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세 번째 주제는 장애인 서비스와 전달체계이다. 우리나라에서 장애로 인해 집중적인 돌봄이 필요하고 부모의 돌봄이 어려운 경우에 대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장애인거주시설이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열악한 거주조건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을 호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미래 모습일 수 없기에 탈시설을 통해 지역사회 내 거주공간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노력이 정책적으로 시작되었고 이제 실천현장으로 확산될 시점에서 제8장에서는 영국의 탈시설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현실에 대한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도출해 보고자 하였다. 제9장에서는 활동지원서비스를 다룬다. 앞서 살펴본 소득보장, 교육, 직업재활 및 고용, 거주 서비스와 함께 5대 장애인정책으로 분류될 만큼 장애인의 지역사회 내 자립을 위해 필수적인 정책이자 서비스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것이 발달장애인을 염두에 두어 시작이 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쟁점들이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재편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추가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제10장에서는 장애인복지 전달체계를 다룬다. 직업재활 및 고용, 교육, 복지 등의 분야에서의 현행 체계를 살펴보고 이들이 상호 연계되어 당사자, 당사자의 부모입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어떤 정책조정 기능이 필요한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네 번째 주제는 장애인 인권이다. 사회복지는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급부행정과 인권침해에 대해 정부가 강력하게 대응하는 규제행정의 양 축으로 발전해 왔다. 제11장에서는 다양한 사회계층 중에서 제일 먼저 입법화된 장애인에 대한 차별금지정책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차별하고 있고, 그러한 차별이 사회문제로 간주되었기에 차별금지가 법제화되고 정부가 이에 대해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덧붙여 이러한 차별금지정책이 과연 발달장애인에게도 적절하게 작동될 것인지에 대해 부가적으로 살펴보았다. 제12장에서는 장애인 권익옹호를 다룬다. 차별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에서 파생하는 것이라면, 권익옹호는 장애인이 자신을 옹호하는 힘을 기르고 이들의 권익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사회가 관련 환경을 만들어 주고 이들을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며 아울러 학대·유기·방임 등 인권침해 사례가 발생했을 때는 적극적으로 당사자의 편에서 침해된 권리를 회복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이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제13장에서는 장애인 정책 속에서 발달장애인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조목조목 들여다보고자 하였다.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질 만큼 그동안「장애인복지법」등 장애인복지정책이 발달장애인의 현실과 관점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을 살펴보고 앞으로의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하였다. 제14장에서는 우리 사회의 최근 환경변화에 기초하고 미래전망을 담아 장애인복지가 어떻게 변화·발전해야 하는지를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오랜 시간 동안 이 글들과 함께하였지만 책을 내면서 많은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먼저 보다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정책과 실천현장, 실천현장과 장애인 당사자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맥락적 정보들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보다 시간을 가지고 고민들을 익혀서 내용을 재정리해야 할 때가 필요할 것 같다. 또 저자가 정책의 실천현장에는 있었지만 장애인서비스의 실천현장에 몸담은 적이없어 장애인복지 실천기술적 측면에서의 다양한 쟁점들을 풍부하게 논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저자의 부족한 능력 때문이니 아쉽다기보다는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끝으로 부족한 글 책으로 만들자고 손 내밀어 주신 공동체 출판사 사장님과 책이 나올 때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게 지지해 주신 김원희 상무님께 감사를 드린다. 또 여기까지 오기까지 여러 장애 정책 분야 동료 교수들의 애정이 어린 조언과 가르침, 현실과 가야 할 미래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장애인 당사자분들과 부모님들, 그리고 우리는 투쟁할 테니 나에겐 자기들에게 투쟁할 논리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서 함께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애써 위로해 줬던 장애인단체의 활동가들. 모두에게 빚진 마음이다. 그들이 덧보태어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그들의 가는 길에 잠시라도 더 오래 머물러야겠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2019년 여름.
삼각산이 내다 보이는 내 조그마한 우주인 연구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