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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를 전공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도 장애인복지는 생각지 않았다. 막연히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겁겠다는 느낌이 들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상담, 치유 그리고 여성복지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운명은 피하려면 더 따라붙는다는 말처럼 범을 피하려다 여우를 만난 격이었다. 그래도 젊어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세상풍파를 겪은 후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마 내가 이 일을 하기 위해서 그런 선행학습들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런 과정들이 없었다면 어려운 고비들을 잘 넘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 이용자들을 깊이 이해하기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철없는 사람이 겁도 없이 시도해 보지 못한 일에 대한 미련과 호기심으로 저질러 버렸다. 그 시기 내리막길로 치닫는 시간 앞에 뭔가 터트려 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속에서 차오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아마 중년의 심리적 위기에서 나온 도전 내지 탈선인지도 모른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끝까지 가슴에 남아 있는 것처럼, 내가 선택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호기심 내지 도전정신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고상하게 표현해서 도전정신이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객기였는지도 모른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가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얼마나 연민의 정을 느꼈던가?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뭐라도 저질러 버림으로써 내가 그 나이 때쯤에는 모든 기회가 다 가버렸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미덕을 가지고 싶다는 고상한 소망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순탄치 않을 것 같아 보이는 모험 길에 풍덩 뛰어들어 첨벙대며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복지관의 전후 사정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무모하게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식이 용기라고 이미 엎질러진 물로 좌우지간 새롭게 정리해 낼 수밖에 없는 난감한 입장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법이 있다고 하니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길이 있을 것이라는 모호하고 애매하기 짝이 없는 희망을 내 생명줄처럼 붙잡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도 명색이 교수고 사회복지 실천기술 분야를 20년 넘게 가르쳐 온 사람인데 제 발로 현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겁을 먹고 달아날 수도 없고, 당사자들에 의해서 축출당하는 수모를 당해서도 안 되는 개인적인 절박감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조언을 구하고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나를 더 겁주는 것들로 맥 빠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소문에 들리는 바가 사실인지 알아보고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면 투명하고 전문적인 운영으로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는 오기내지 정의감이 치솟게 만들어 준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책 좀 읽은 것 외에는 별로 아는 바도 없고, 현장경험조차 없는 사람이 뭘 믿고 오기를 부릴 것이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이런 저런 걱정으로 불안을 넘어선 공포감마저 들었고 자다가도 벌떡벌떡 깨는 불면의 밤이 길어만 갔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후덕하고 넉넉한 미소로 봉사하시던 회장님, 끈질긴 괴롭힘에도 끝까지 장난치며 반기던 나를 좋은 사람이라 부르던 배불뚝이, 나만 보면 하이파이브를 외치던 여전사, 브로치 떼려고 내 목을 졸라 기겁시킨 장미란, 반쯤 감긴 눈으로 반기던 미소천사, 사탕 한 알 살짝 전해주고 모른 척 가버리는 발발이, 나를 자기 애인이라 자랑하던 엉거주춤 씨, 한 분 한 분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분들과 함께한 기억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래, 우리들이 함께한 놀이터엔 장미같이 화려한 꽃이 아니라 땅에 바짝 엎드려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채송화같이 작고 소박한 색색의 꽃들이 가득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우리가 만들고 가꾼 봄날 꽃놀이였다. 때로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과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러기에 서로 의지하며 온기를 나눌 수 있었고 속으로 여물어 갈 수 있었다. 삶이 그렇고 세상살이가 그런 것처럼, 우리들의 노래는 한 움큼의 눈물을 꿀꺽 삼켜버리고 다시 털고 일어선 자들의 관용과 훈기를 전한다.
말로만 복지한 것이 아니라 직접 실천했고 그래서 말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지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다. 우리 학생들에게도 좀 더 실질적이고 현장감 있는 교육을 할 수 있어 좋았고, 개인적으로도 좀 더 떳떳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내가 이 땅에서 한 일 중 그나마 잘한 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도 많았고 실수도 많았다는 것을 인정하며 혹시나 섭섭한 점이나 나의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과 상처를 겪은 분들에게는 심심한 용서를 구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이용자들과 그동안 많이 도와주고 지원해 주신 자원봉사자와 후원자 등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나보다 더 많이 고생한 우리 직원들 모두의 수고와 노력에 큰 고마움을 전한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1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며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리고 상황적으로도 좀 특별한 여건이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혹시 장애인이나 복지 현장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든다. 분명히 밝히지만 여기서 다룬 내용은 꾸며낸 이야기는 아니지만 약간의 가공이 가미되어 있고 좀 특별하기에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며,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모두 가명으로 처리되었고 본인들의 승낙을 받았다. 그리고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바로 우리와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웃의 이야기로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이러한 이야기를 기록한 또 다른 이유는 먼저 복지현장에서 일한 실천가들이 추구하고 노력한 생생한 이야기를 글쓰기로 전달함으로써 뒤에 오는 이들에게 작은 발자국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이 일을 통해서 우리 이용자들과 함께 성장했고 그 모든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과 함께한 시간이 나름 행복했다. 우리 이용자들로부터 받은 많은 애정과 신뢰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는 영광을 누렸고 내 삶의 가치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노력이 어려운 이웃들의 가슴에 작은 온기와 미소로 기억되길 바란다.
12년 동안 함께한 복지관을 떠난다는 인사를 하자 이용자 중 한 분이 내게 한 말이 가슴에 남아 있다. ‘관장님은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셨어요. 정말 감사하고 수고 많았습니다.’ 이보다 더한 보상과 헌사는 없다. 나의 진정성이 전해진 이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피로와 무거움이 씻어지기에 충분했다.
2019년 8월
안개비 내리는 해운대 언덕에서
최선화
1장 변화에 대한 의구심
사람은 정말 변하는가? 17
무엇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가? 26
변화는 자기관리에서부터 33
열등감이라는 잠재력 38
반전의 매력 43
실패도 스펙이다 47
2장 변화의 기반
사회복지는 생활이다 55
사회복지는 소통이다 60
사회복지는 공감이다 64
사회복지는 감동이다 69
마음 얻기 73
열린 마음 78
아직 죽지 않았어 82
이웃복지 86
마을복지 89
3장 변화의 기술
적극적 경청 95
당사자들의 참여 99
고양이를 호랑이로 102
분위기 만들기 106
내담자들 111
삶의 치유 116
사회복지와 유머 125
아모사 (아름다운 모라를 사랑하는 모임) 130
인문대학 134
맘파워 공동체 139
이용자 회의 146
4장 사회복지사의 내적 성장
쿵푸팬더 165
말은 지금 달려야 한다 171
시시비비 175
궁하면 통한다 179
길을 찾아 나선 여정 185
5장 만남과 나눔
당연한 것은 없다 193
어떤 인연 198
시라소니 형님 205
쌍용오빠 210
할머니의 보퉁이 215
함께 물들어 가는 가을 219
민철 씨 224
특별한 여행 229
찬란한 하루 234
구슬 유리병 239
부부애 243
나오며 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