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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학 중심 

토론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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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말하기-글쓰기를 해야 하는가?

  이 세상을 원래부터 있었던 자연계와 사람들이 만듦으로써 이루어진 인공계로 나눌 때 인공계의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사유 결과물이다.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퐁티라는 철학자는 우리 몸에서는 생각 자체가 이미 말로 녹아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 그만큼 말은 우리 몸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말(언어)은 인간사고 표출 과정에서 불가결한 수단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남이 볼 수 있도록 문자로 표현한 것이 ‘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을 듣고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또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하여 다른 사람의 사고를 자극하는 글의 이합집산(離合集散)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데, 이것이 쌓이면 역사가 되고 깊어지면 학문이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와 글쓰기는 인류 역사를 이끌어 온 사고의 매개체요, 학문의 수단이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인류 역사 이래로 가장 많은 사고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분화로부터 끊임없는 창조적 사고가 무한대로 이어져 가고 있는 시대이다. 앞으로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더욱 표현해야 된다.
  지금 우리는 각종 매체들이 발달해서 특별히 말하기와 글쓰기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일상생활에서의 편리함은 될지언정 사고 주체로 성장시키지 못한다.
  매체의 발달로 일상생활의 ‘말’과 ‘글’이 간편해진 것에 비례해서, 자신의 생각을 진짜로 잘 표현해야 하는 말하기와 글쓰기는 더욱 강조되고 있다. 간호사라는 전문직으로 일하면서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출장내용을 보고서로, 억울한 내용을 호소문으로, 업무상 다른 기관의 협조를 위해 공문으로…. 각각 글의 양식은 다르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글을 써서 표현해야 하고, 세미나와 워크숍, 공청회 등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발표해야 하는 경우가 어찌 한두 번이겠는가? ‘말’이든 ‘글’이든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내면과의 교류에도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사색하고,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때 가장 흔하게 나오는 것이 수필과 시이다. 바쁜 일상을 살면서도 자신의 생각대로 시나 수필을 써보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이고 내면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인가?
  서점에는 말하기와 글쓰기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여기에 제가 책을 하나 더 보태는 것은 ‘삶’과 ‘앎’의 프레임에 대한 강조 때문이다. 예화를 하나 들어 보겠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오래된 某 방송국 TV 프로그램이 있다. 과거에는 봉투 접기를 빛의 속도로 할 수 있다든가, 혹은 물에 젖은 소가죽을 종잇장 다루듯 할 수 있는 기능적으로 숙달된 달인들을 소개했는데 지금은 전국적으로 혹은 지역적으로 소문난 맛집을 찾아 맛의 고수들이 가진 비법을 소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대부분 자신들의 비법 공개를 꺼려하지만 제작진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공개를 하는데, PD가 측은하여 묻는 말이 있다. ‘이렇게 공개해도 괜찮겠어요?’ 그분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이랬다. ‘비법을 가졌다고 부자 되면 누구나 부자 되게?’
  비법이라는 ‘앎’이 맛집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삶’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맛집>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분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반죽의 숙성을 살피고, 재료의 불 조절을 위해서 화덕 옆에 쪽잠을 자면서 30년을 버텨낸 삶의 달인이었고, 세상이 말하는 비법이란 그저 그분들의 삶 속에서 경험으로 잉태된 레시피에 불과했다. 비법을 알려줘도 삶으로 승부하지 못하면 말짱 <도로 묵>이기 때문에 맛의 고수들은 자신의 비법 공개로 경쟁이 될 수 있는 잠재적인 맛집의 등장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앎’과 ‘삶’이 소통된 경계에 서신 분들의 대단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일상에서 ‘앎’과 ‘삶’의 소통이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지행합일이라는 어려운 말로 앎과 삶의 소통을 도덕시간이 점철되도록 배웠지만 실제 개인의 ‘삶’에서, 사회적 협력과정에서 합일되지 않는 사례들을 너무 많이 경험했다. 굳이 축약해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현대사회에 올수록 ‘앎’만 있고 ‘삶’이 없다. 그래서 어느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을 돌려주자는 주장도 했다. 각자가 나름의 삶의 비법은 있을 터인데 그 삶은 맛집의 비법처럼 맛이 나지 않는다. 왜 맛이 없는 삶이 되었는가?
  지금 우리들 삶의 키워드는 자본, 경쟁, 효율, 능력, 스펙(spec) 등인데 이것들은 ‘앎’의 결과물로서 이미 ‘삶’을 점령해 버렸다. 사람들은 <삶다운 삶>에 대한 표상이 무엇인지조차 생각해 볼 겨를이 없이 ‘앎’의 메타포(metaphor·은유·隱喩)에 빠지게 된다. 가을에 가을이 없고 가을이라는 이미지만 머릿속에 남긴 채 생활한다면 ‘앎’의 메타포에 빠진거다. 우리가 시·공간을 산다고 하지만, 실제 시간 느낌은 누구나의 머릿속에 설정된 시간계획표(schedule)에 의해서 작동되는 프로그램에 불과하며, 공간 느낌은 집에서 회사까지의 교통노선이 거의 전부로 여기는 삶에서 이미 시간과 공간은 메타포만 남아있을 뿐이다. TV 광고에서 보듯이 거꾸로 타는 보일러를 사드리고, 효도관광을 몇 번 보내드렸는가? 등이 효도의 척도가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효도라는 개념이 이미 ‘삶’ 속에 녹아있는 그것이 아니고 ‘앎’의 메타포로 전환되었기 때문인데,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컨텍스트(context)가 없는 텍스트(text)>라고 표현한다. 컨텍스트는 어떤 일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배경과 맥락을 말하고, 텍스트는 그 일의 내용을 말한다. ‘효도’가 ‘삶’의 맥락보다는 ‘앎’으로 처리해야 할 사건처럼 이벤트(event)화되어 있는 것이다.
  ‘앎’과 ‘삶’에 관련하여 간호사는 ‘의학은 과학이되, 의료는 문화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간호사는 환자의 치료에 참여하는 의료인으로서 환자의 질병만 볼 것인가? 인간으로서 환자 전체를 보아야 할 것인가? 현실은 의사이든 간호사든 환자의 질병만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질병만 본다는 것은 ‘앎’으로 환자를 대하는 것이고, 환자를 본다는 것은 ‘삶’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단을 해야 하는 의학은 ‘앎’이지만, 치료과정으로서 의료는 ‘삶’이다. 만일 여러분이 ‘앎’으로 점철된 의료문화의 현실을 볼 수 있다면 거기에는 비판적 시각이 필요하고, 그 비판적 시각을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해서는 글쓰기와 토론을 통한 자기 사유가 필요하다.
  글을 쓰고 말을 하려면 글감과 말거리를 발견하는 것이 우선인데, 그 글감의 대부분은 ‘삶’에 녹아있지 ‘앎’에서 발견되는 것은 논문을 제외하고는 그리 많지 않다. 글감과 말거리를 ‘삶’에서 찾아내기 위해서는 삶의 과정들에 대한 면밀하고도 치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관찰을 위해서는 ‘낯선 것들과 친해지기’와 ‘친숙한 것들을 다시 보는 새로움’이 필요하다. 예컨대 우리 주변을 볼 때 <주택은 많으나 집은 없고, 도로는 많으나 길은 적다>라고 표현한다면 주택과 집의 이미지와 길과 도로의 이미지가 모두 친숙한 것이었는데, 그것의 차이가 가져오는 이미지는 매우 낯선 것이다. 주택과 집의 사전(事典)적 의미는 사실상 차이가 없다. 하지만 주택은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라는 데 초점이 있지만 집은 물리적 의미를 넘어서 살고 싶은 공간으로서 정서적 의미로 다가온다. 도로와 길도 같은 맥락에서 도로는 그 기능이 매우 효율적인 것에 초점이 있어서 고속도로 같은 것을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반면, 길은 효율과는 별도로 감정과 정서가 있는 오솔길 같은 것을 연상할 수 있다. 주택과 도로가 ‘앎’을 표상하는 공간과 효율의 이미지라면 집과 길은 ‘삶’을 표상하는 정서와 감정의 이미지이다. ‘삶’은 과학이라는 ‘앎’이 지향하는 것처럼 항상 효율적이고, 실증적이어야 하며, 생산적이어야 하고, 분석적일 수는 없다. ‘삶’은 때로 두루뭉술하고, 때로 과학보다 더 날카로운 지혜의 세계일 수 있으며, 좀 비효율적이더라도 그것이 더 재미있고 아름다울 수 있는 주체들의 모임이다. 발 딛고 사는 모든 공간세계는 이성적 조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성 너머의 <실존>의 세계이며, ‘앎’ 아닌 ‘삶’의 공간이다.
  이 책에서는 바로 ‘앎’과 ‘삶’의 프레임으로 말하기와 글쓰기를 보자는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물론이거니와 말을 할 때도 ‘삶’에 기반하지 않은 것은 설득력과 현실감이 없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실존이 부재하고 ‘앎’을 위한 ‘앎’이 판치는 세상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지금 글쓰기 수업에 임하는 많은 대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어떤 학생이 인터넷에 올린 글쓰기 두려움에 대한 솔직한 자신의 생각을 적어본다. 다음은 그 학생의 글이다.

…그렇다. 나에게는 글을 쓰는 습관이 없다. 현재 내가 전공하는 과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실험 레포트 이외에는 아무런 글도 쓰지 않는 것 같다. 나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 보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 내가 이처럼 평소에 글을 잘 쓰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부족한 자신감 때문에 글 쓰는 것을 더더욱 어려워하는 것 같다. 글을 쓰는 습관도 없고, 자신감도 부족해서일까…? 지금 이렇게 ‘본인의 경우 왜 글쓰기가 힘든지 그 이유를 적어보시오’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무척이나 어렵다.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워서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다 보면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쓸 수도 있고, 맞춤법이 틀렸을 수도 있고, 앞뒤 문맥에 맞지 않게 쓸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쓴 그러한 잘못된 글을 누군가가 보고 비웃을 걱정에, 나에 대한 이미지가 글을 잘 못씀으로써 깎여버릴 것만 같은 걱정 때문에 글을 쓰려고 시작할 때부터 두렵다.

  이렇게 생각하는 학생들의 입장에 대해 교수인 나의 입장은 어떠할까? 왜 학생들은 글쓰기를 두려워할까? 가장 큰 이유를 든다면 여러분 스스로의 사고체계가 잡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고를 토대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사고에 의해서 여러분이 끌려다니고 심지어 조정당하고 있다. 여러분에게 옳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옳은 것들에 대해서 학습하고, 또 학습된 대로 사고하고, 그렇게 학습된 사고가 아니면 틀린 것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만연하여 여러분 스스로의 사고에 대해서 항상 자신이 없는 거다. 스스로 사고에 대해 자신이 없으면 그것을 펼쳐보고 싶은 동기부여가 안 되고, 그렇게 되면 자기 생각의 표출수단이라고 말했던 글쓰기와 말하기는 자신이 없게 되고, 더 나아가 할 수 없거나, 하더라도 애당초 학습된 ‘사회적 옳음’을 토대로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나타내는 정도에 불과하게 된다. 

  교수로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강의를 하면서 여러분의 생각을 따라가 보고, 실제 생각을 들어보고, 발표도 시켜보고… 했던 결과, 느낀 것이 이것이다. 거꾸로 여러분이 스스로의 사고가 분명하고, 여러분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게 된다면, 세상을 보면서 느끼는 것들이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을 것이고, 여러분의 사고를 표출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가 될 것이다. 생애주기로 보았을 때 여러분 대학생의 위치와 나이에서는 이런 표출의 욕구가 용솟음칠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은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분도 이를 통감해야 한다.
  이제 여러분이 글쓰기와 말하기를 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말해보겠다. 한마디로 특별히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나를 대변하는 말들이 너무 많이 떠돌고, 내가 쓰지 않아도 너무 좋은 글들이 난무한다. 그것도 내 맘을 쏙 빼닮은 말과 글들이 SNS에 넘쳐난다. 나는 가져다 쓰는 이용자로 만족할 수 있으니 내가 힘들여 말하고 글 쓸 필요가 있나? 여러분만이 아닌 현대인의 대체적인 양태가 그렇다. 여기에 대해 나는 이런 답변을 하고 싶다. 그래!말과 글이 넘쳐난다. 말과 글의 풍요 속에 살아서 좋았다면, 이제 남는 것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안목이 필요해질 것이다. 갈수록 세상은 정보의 홍수 속으로 빠져 들고 있다. ‘앎’이 넘쳐나서 ‘삶’을 지배하고 있다. 남이 만들어 낸 ‘앎’과 정보들에 의해 나의 ‘삶’이 지배된다면 다시 ‘나’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난무하는 정보들 속에서 나의 ‘삶’을 위해서 결국 최종 판단을 해야 하는 ‘나’는 다시 나의 생각을 정립해야만 한다.
  ‘세상의 옳음’을 학습하고 그 학습한 대로 사고하는 데 익숙했던 ‘나’는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의 옳음’이 아닌 ‘나의 옳음’은 무엇인가? 이전의 ‘나’는 세상이 만들어 준 ‘나’라면 이제부터 ‘나’는 세상을 만드는 ‘나’인 것이다. 내가 세상을 만드는 방법은 다시 생생한 나의 사고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방식이 있을 뿐이다. 결국 내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간 세상의 바탕이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 생각을 갖는 수단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글쓰기와 말하기이다. 여러분 중에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생각을 가지면 되지 뭐 쓰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마음속으로 가졌다고 해서 그 생각이 ‘세상을 보는 생각’으로 발달되지 않는다. 여러분도 너무 잘 알고 있다시피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생각이 단순히 나에게 머물고 만다면 그것은 단순히 나만 알고 있는 나의 ‘앎’에 불과할 뿐 나의 ‘삶’을 위한 생각이 될 수 없다. 지금까지 말해왔듯이 나에게 ‘나의 생각’이 필요한 것은 나의 ‘삶’을 위한 것이다. 내가 산다는 것은 ‘세상에 산다는 것’이지, 나 혼자 산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삶’이란 나를 세상에 내놓는 것>인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검증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다시 글쓰기와 말하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차원에서 말하기와 글쓰기는 단순한 표현방법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생각하는 게 있어야 표출할 수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인데, 여러분은 지금까지 여러분의 생각이 없었거나, 약했기에 표출의 욕구를 느끼지 못한 것이나, 이제 지금까지의 말들을 듣고 생각해 보니 내가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정말 필요한 것이 나를 나타내는 방법이 있어야겠다는 것이고, 그 구체적인 수단이 바로 말하기와 글쓰기라는 것임을 더 구체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쓰여졌다. 단순한 문장론이거나 글쓰기 표현방식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싶다.
  그리하여 이 책의 1부(제1장에서 4장까지)에서는 글쓰기와 말하기의 바탕 생각을 정리하였다. 바탕 생각의 핵심은 ‘세상의 옳음’을 따라 학습하고, 학습한 대로 생각하고, 그 생각들이 여러분의 ‘앎’으로 머물게 된 사연들을 밝혀서, 이제 거꾸로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 중심에 ‘앎’과 ‘삶’이 있다. 학습된 ‘세상의 옮음’들이란 바로 여러분의 ‘앎’으로 자리 잡았고, 여러분의 ‘삶’은 그 ‘앎’으로 지배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생각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이제 거꾸로 ‘삶’을 통하여 ‘앎’을 재해석해 보아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 여러분의 생각이 열리고, 생각이 열리면 여러분 생각대로 세상을 보면서 글쓰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비로소 용솟음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제 2부에서는 실제 글쓰는 방식들에 대한 소개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 개개인마다 모두 다른 얼굴을 가졌듯이 글과 말도 그것의 얼굴이 있다. 말이나 글이나 얼이 빠지면 생명을 잃는다. ‘얼’을 먼저 챙기고 그 다음 ‘꼴’을 생각해야 한다. 그 다음에 세부적으로 다듬는 과정이 필요할 것인데, 이것이 ‘문장론’ 같은 표현기술이다. 3부에서는 간호사에게 필요한 핵심적인 주제들을 모아 토론하고자 한다. 그 주제들은 여러분의 생각으로 세상을 보았을 때 나타나는 문제점 위주로 잡은 토론 거리들이다. 사뭇 열띤 토론이 이어질 수있기를 바란다.

 

1부 바탕생각


CHAPTER 01 삶의 발견

1. ‘앎’의 해석과 ‘삶’의 발견
2. 과제-생각 넓히기


CHAPTER 02 최고 대학, 최고 성적 A+ 조건

1. 방송내용 줄거리
2. 글쓰기 시사점


CHAPTER 03 말과 글을 위한 철학적 사유 해보기

1. 우리는 왜 철학을 해야 하는가?
2. 존재론
3. 인식론
4. 철학적 사유의 실제


CHAPTER 04 비판과 논리

1. 비판적 사고
2. 논리적 사고의 필요성
3. 논리적 추론(논리적 사고의 실제)
4. 논리적 오류


2부 글과 말의 집짓기


CHAPTER 05 글쓰기 이론

1. 글과 글감의 발견1
2. 글의 얼굴
3. 글의 틀 짜기(구성)
4. 서론과 결론(=띄움과 매듭짓기)


CHAPTER 06 말과 글의 표현

1. 좋은 글 표현
2. 좋은 말 표현
3. 좋은 어휘력
4. 퇴고(마지막 손질)


CHAPTER 07 실용문 쓰기

1. 필요성
2. 육하원칙
3. 문서작성의 기본 원칙
4. 실용문 예시


CHAPTER 08 양적 연구와 질적 연구

1. 양적 연구
2. 양적 연구 따라잡기(사례 보기)
3. 질적 연구
4. 질적 연구 따라잡기(사례 보기)


CHAPTER 09 토론의 실제

1. 토의-토론-논쟁
2. 토론의 형식
3. 토론의 실제(주제별 토론)


참고문헌